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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세 가지를 제외하고 그의 행위들은 끝나느니라. 그 세 가지는 그가 생전에 행한 자선과 유익한 지식과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훌륭한 자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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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성격
그의 성격
무슬림에게는 선지자 무하마드 또는 그 앞에 선지자에 대한 그림이나 그림이 없다. 그러나 예언자 무하마드는 당시의 위대한 신앙 전통의 창시자와 달리 그의 동반자 및 가족 구성원이 그를 잘 묘사하고 후손을 위해 자신의 삶에서 많은 이야기를 기록 했으므로 훨씬 더 유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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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역사는 무하마드가 사람들을 숭고하고 인간적으로 다루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부르심과 가르침은 우애와 형제애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역경은 그의 행동에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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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무함마드는 자신을 하나님의 메신저로 선언했다. 그는 인류에게 신의 메시지를 받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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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구부러진 나무는 호주 시드니 남부의 Nowra에있는 캠핑 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무슬림기도에서 하나님 께 절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무의 아래쪽 가장자리는 굴복하는 사람의 머리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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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무하마드
전기
연보
이름 | |
무함마드 |
---|---|
아버지 이름 | |
압둘 무딸립의 아들 ‘압둘라’ (그의 혈통은 예언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로 거슬러 올라간다) |
가문 | |
바누 하쉼에 속함 (바누 하쉼: 아라비아반도의 유명한 귀족 쿠라이쉬(Quraish) 부족의 한 일가) |
출생 | |
대략 서기 570년 4월 20일-22일 1 |
출생지 | |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
사망 | |
서기 632년 6월 6일 (63세를 일기로 타계) |
사망 | |
메디나 (메카에서 북쪽으로 약450km) |
어린 시절, 청년기
출생 ~ 2세 | |
외아들이자 유복자로 태어남 베두인 족의 전통에 따라 유목민의 유모 「할리마」의 보살핌으로 성장 |
---|---|
6 ~ 8세 | |
어머니 「아미나」가 57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음 |
6 ~ 8세 |
|
조부 「압둘 무딸립(Abdul Muttalib)」 밑에서 성장 |
8~ 25세 | |
10명의 자녀를 둔 숙부 「아부 딸립(Abu Talib)」 밑에서 성장 |
Working Life
어린 시절 ~ 20대 중반 | |
양치기외 무역. 숙부로부터 무역을 배워 대상이 됨. 숙부 아부 딸립과 함께 12살 때 최초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교역 여행길에 동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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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 ~ 40세 | |
메카의 거상이었던 「카디자(Khadijah)」의 무역 대리인으로 활약.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앗-싸디끄 알-아민”, 즉 ‘정직하고 신뢰가 깊은 사람’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그의 정직함과 고상한 인품 때문이었다 |
40 ~ 63세 | |
40세에 이르렀을 때 (서기 610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임을 자각. 그 후로부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유일성과 사회정의와 평화, 조화와 안녕을 누리는 하나님의 말씀 (꾸란)을 가르쳤다 |
생전 활동
교육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으며 교육은 커녕 배운 사람과 함께할 기회도 없었다. 그는 메카에서만 살았고 다른 문화, 문명을 탐구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꾸란을 썼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 슬림은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꾸란을 썼 거나 꾸란의 저자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 중 단 한 글자라도 빠뜨리거나 추가 없이 그 대로 전달했다.
꾸란의 언어는 문맹이었던 예언자 무 함마드SAW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 어와는 전혀 달랐다
결혼
25년 동안 오직 한 여자와 결혼생활: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아사드 가 문의 쿠와이리드(Khuwaylid)의 딸 카디자와 결혼했다.
카디자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업가이자 미망인이었고 무함마드SAW 는 카디자의 고용인이었다. 카디자는 2년 간 무함마드SAW를 지켜보며 정직과 신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카디자는 제3자를 통해 무함마드 SAW에게 청혼을 했다.
행복한 결혼생활:
카디자의 나이는 무함마드SAW보다 15살 더 많았음에 도 불구하고 그 둘은 비슷한 사회층에 속해 있었다.
그들 사이의 나이 차이는 행복한 결혼생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25년 동안 성실한 남편으로 그녀 곁에 있었고 카디자 또한 그를 성 심성의껏 내조하였다. 카디자는 619년에 65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예 언자 무함마드SAW는 후에 재혼했다.
여섯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가정 적인 남편:
무함마드와 카디자 는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꾸려 나 갔고 그들 사이에 딸 넷(자이납 Zaynab, 루꾸이야 Ruqayya, 움꿀쑴 UmKulthoum, 파티마 Fatima)과 아들 둘(알-까심 AlQassim, 압둘라 Abdullah)이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두 아들을 어린 나이(알-까심은 3세, 압둘라.
는 4세)에 잃었다.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집안일을 자청하고 자신의 옷을 손수 바느질하고 아이를 돌보았다.
610년
계시의 시작:
하나님으로부터 첫 계시 를 받음으로2 예언자직을 부여받아 이 슬람을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시 작했다. 그의 임무는 강한 신앙과 헌신 그리고 정직을 필요로 했다.
610 – 612년
핵심 무슬림 형성: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가족과 친구들을 이슬람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예언자직을 부여 받은 첫 3년 간 130여 명이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이슬람 전파 에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 이들 핵심 무슬림 중에는 부자도 있었고 가난 한 사람도 있었다
613 – 615년
무함마드SAW의 전도에 대한 반발:
예언 자 무함마드SAW와 그의 교우들은 공개 적으로 이슬람 전도를 시작했다. 메카 족장들은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정직하 고 신뢰가 깊은 사람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슬람으로의 초대를 거 절하며 예언자를 시인, 점쟁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불러댔다
메카 족장들의 유혹과 협박:
메카 족장들은 무함마드SAW가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초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때로는 물질적 유혹(재산, 인정 받는 계급, 여자 등)을, 때로는 협박까지 했다. 또한 사람들이 무함마드 SAW의 말을 듣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무슬림은 박해의 대 상이 되었다. 특히 재산도 지위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당 했으며 불신자들은 무슬림에게 고문 등 육체적 고통을 가하기도 했다. 100 명 가량의 무슬림은 메카를 떠나 이웃한 기독교 국가 아비시니아(현 재의 에티오피아)로 피난처를 찾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무함마드는 그의 교우 중 일부를 아비시니아로 보냄: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앙의 집회 장소이자 교육 장소였던 아르깜(Arqam)의 집에서 무 슬림들에게 꾸란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혼에 이슬람의 도덕과 가치, 책임과 헌신을 불어넣 었다. 그는 교우들이 심한 고난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기 독교 왕이 통치하는 아비시니아로 피난하도록 했다
영향력있는 두 명의 남자가 이슬람에 입교하다:
장사(壯士)이자 존경받 는 메카 출신 두 사람, 우마르 븐 알-카타브(Omar Bin Al-Khattab)와 함자 븐 압둘 무딸립(무함마드SAW의 삼촌)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 일은 무슬림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함자는 625년에 우후드 전투에 서 전사할 때까지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강력한 보호자이자 지지자였 다. 우마르는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사망 후 3년 뒤 두 번째 칼리파가 되어 이슬람국가를 11년 동안 통치하였다.
616- 618년
거부 당하는 예언자 무함마드SAW:
메카 족장들은 예언자 무함마드SAW 와 그의 추종자들을 강제로 제한 구역 내에서만 살게 하고, 그들에게만 식량공급을 중단하였다. 이는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예언자 무함마드SAW와 그의 추종자들은 큰 고난을 겪었으며 그들의 인 내심과 신앙, 진리를 향한 헌신을 확인하는 시기였다.
619 - 620 CE
슬픔의 해:
메카 족장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지쳐 결국 박해는 점차 약해져 갔고 식량 금지령도 폐지되었다. 같은 해에 예 언자 무함마드SAW의 아내 카디자와 삼촌 아부 딸립이 세상을 떠났다.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메카에서 희망을 잃고 메카 외의 다른 곳에서 하 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타이프(Ta'if)로 갔지만 적의에 부딪쳤다.3 뿐만 아니라 그는 20개 이상의 아랍 부족을 만나 그들에게 이슬람을 설명했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620- 622년
희망의 빛: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성지순례 기간에 야스립(Yathrib; 메카의 북쪽 으로 약 450km 거리. 현재의 메디나)에서 온 여섯 명에게 이슬람을 소개했다. 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야스립에 돌아가서 그들의 부족과 다른 부 족사람에게 예언자 무함마드SAW와 만나기를 권했다. 권유를 받은 사람 들은 다음해 성지순례 때 메카로 가서 하나님의 예언자 무함마드SAW와만날 것을 약속했다
새로운 무슬림들의 맹세
야스립 출신 여섯 명은 다음 해(621년)에 다른 여섯 명과 함께 메카로 갔다.4 그들은 무함마드SAW가 하나님의 예언자임을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맹 세했다.
1-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는다
2- 도둑질하지 않는다
3- 간통하지 않는다
4- 살해하지 않는다
5- 이웃을 중상모략하지 않는다
6- 하나님의 예언자에게 불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야스립으로 돌아가 족장들과 부족사람을 이슬람으로 초대했다. 그리하여 다음해(622년) 메카 성지순례 때는 70명의 남성들과 2명의 여성들이 예언자 무함마드SAW앞에서 맹세했다.
메카의 북쪽 450km에 새로운 무슬림공동체 구성:
야스립 주요 두 부 족(아우스(Aws) 부족, 하즈라즈(Khazraj) 부족)의 족장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그 후 그들의 부족사람들도 무슬림이 되었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요청했다
622년
메카 족장들의 예언자 무함마드SAW 살해음모와 야스립(메디나)으로의 이주:
메카의 모든 상황은 악화되었다.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메카의 무 슬림들에게5 야스립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그들과 함께 예언자 무함마 드SAW도 622년 9월에 야스립으로 이주하였다.6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이주는 이슬람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써 야스립에서 최초 의 이슬람 국가가 탄생했으며, 새롭고 빛나는 정의사회의 질서가 확립 되었다
623-624년
야스립 최고 수장이 되다:
야스립은 아랍인과 유대 인이 함께 사는 도시였다. 2개의 주요 아랍 부족과 3 개의 작은 유대 부족이 살던 야스립에는 아랍인이 유대인보다 많았으며 통치권도 행사하고 있었다. 야스립 사람 대부분의 합의로 예언자 무함마드SAW 는 평화롭게 야스립의 수장이 되었다.
야스립의 이름을 바꾸다:
“메디나”는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지은 야스 립의 새로운 이름이다. 야스립은 메카 무슬림들의 이주 후, 아랍인들이 사는 도시가 아니라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조국이 되었다.
야스립에 거주하는 유대인 부족들과 이슬람을 선택하 지 않은 아랍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야스립을 ‘이슬람의 도시’로 부르지는 않았다. 대신에 야스립을 “알-메디나” 즉, 모든 거주자가 동등한 시민권을 갖는다는 의미로 “도시”라고 이름 지었다.
메디나에서 평화와 인권을 세우다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메디나 사람들에게 했던 첫 공개 연설에서 사회 적 조화와 통합의 증진을 함축적으로 전했다.
“오, 사람들이여! 너희 상호 간에 이슬람식 인사를 나누도록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다른 이가 잠자는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드리 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고 천국에 갈 것이니라.” (Ibn Majah, 4331) and (Tirmidhi, 5842)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위와 같은 행위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 라 강조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다문화 사회에서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 존할 수 있게 했다.
623-624년
메디나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최초의 인권’ & ‘자유조약’ 체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마지막 예언자가 유대인들 중에서 나올 것이라 기 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 대부분이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 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메디나의 수장으로) 모든 아 랍인과 유대인 부족이 합의한 “인권과 자유의 헌법과 헌장”에 대한 조약 을 체결했다.
624년
불가피한 바드르(Badr) 전투:
무슬림들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자, 메카 족장들은 무슬림들의 재 산을 몰수하고 사업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부 수피얀(Abu-Sufyan)이 이끄는 무역 대상이 메디나 근처를 지나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무슬림은 메카에서 빼앗긴 재산에 대한 대가로 무역 대상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313 명의 무슬림들이 이 임무를 맡 게 되었다.
무슬림들의 공격 정보를 입수한 아부 수피얀은 이동경로를 바꾸었고 메 카인들도 950 명으로 군대를 구성하여 무슬림 군대와 싸우도록 했다.
무슬림 군대는 장비뿐만 아니라 전투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였다. 그런데 메카 족장들에 대항한 그 첫 전투에서 무슬림들은 빛나는 완승 을 거두었고 무슬림들에게 박해를 가했던 메카의 족장 일부는 전사했다.
625년
메카의 족장들이 예언자 무함마드SAW와 그의 교우들을 공격한 우후드 (Uhud) 전투:
메카 족장들과 일부 아랍 부족이 바드르 전투에 대한 보 복과 아라비아반도 주인의 자리를 잃을 수 있음에 우려해 3,000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메디나 북쪽 우후드 산에서 총공격을 가해왔다.
무슬림들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고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부상을 입었 지만 살아남은 반면,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사랑하는 삼촌 함자와 일부 교우가 전사했다.
626년
메카와 다른 부족 연합군이 예언자 무함마드SAW와 교우들을 공격한 참호 전투:
이전 전투에서 예언자 무함마드SAW를 죽이지 못했기에 메카 족장들은 일부 아랍 부족, 유대인 부족과 연대해 예언자 무함마드SAW와 무슬림 공동체를 파괴할 계획을 세운다.
10,000 명이 넘는 군대가 메디나를 향해 진격해왔고 예언자 무함마드 SAW는 페르시아인 ‘살만(Salman)’의 충고에 따라 방어막으로 메디나 의 북쪽에 (4.6m 넓이 5.5km 길이의)참호를 파기로 결정한다.
한 달 넘게 무슬림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자, 이교도 군대는 참을성을 잃 어갔고 점차 동맹군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내부 갈등과 혹독한 기상 상태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결국 막사를 거두고 군대를 철수했 다. 이는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였으며, 이후 메디나는 침략 당하지 않 았다.
627년
“후다이비야(Hudaybiya) 협정”, 10년간 휴전:
참호 전투 1년 후에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평화를 위 해 우므라(Umrah, 소순례. 메카에 있는 카아바를 방문하고 종교 의식을 행함)를 계획한다. 종교 의식을 행하기 위해 메카를 방문하는 것은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모든 사람의 권리였고 이는 메카인의 관리 하에 있었다.
메카 족장들은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1,400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메 디나에서 메카로 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매우 놀랐다.
여러 협상 후, 메카 족장들과 예언자 무함마드SAW 사이에 10년 간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예언자 무함마드SAW와 교우들은 다음 해(628년)에 메 카를 방문한다는 조건으로 메디나로 돌아갔다. 많은 무슬림들은 협정의 내용에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슬림들보다 메카 사람들 측에 더 많은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 무함마 드SAW는 이 협정을 승리로 선언했다.
628- 629년
휴전 기간 동안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하나님의 말씀 을 아라비아 안팎에 전달:
휴전은 예언자 무함마드SAW에게 어떤 방해 나 간섭도 받지 않고 이슬람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다른 아랍 부족에게 이슬 람을 소개하는 대표단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왕이나 통치자 그리고 페르시아, 비잔틴, 이집트 같은 초강대국에 하나님의 예언 자로서 이슬람으로 초대하는 서 신을 보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평화의 시기에 많은 비무슬림들 이 이슬람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결국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슬 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630년
‘평화롭게’ 메카를 정복하다:
약 2년 뒤 메카인들은 휴전협정을 위반하 고 무슬림들과 동맹을 맺은 부족을 공격하여 20명을 살해했다. 그 후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격했다. 이는 정복 역사상 가장 놀랍고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 이유는 메카 의 정복이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정복이었기 때문이다.
무슬림군은 메카에 입성하기 전, 메카인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임을 통보하였다. 무슬 림군대가 메카로 들어가자 예언 자 무함마드SAW는 메카인에게 하 나님의 유일함과 승리는 하나님께 있 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은 흙으로 창조되어 졌음을 연설했다.
그런 후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하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자비로운 형제이자 자비로운 형제의 아들 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오직 선만을 행하실 것입니다.
모범적인 관대함: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지난 21년 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이슬람의 진리를 비웃었던 메카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 며 관대함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가시오. 여러분은 이제 자유 롭게 갈 수 있소.” 그는 그들 모두를 용서함으로써 전 인류와 모든 세대에 가장 완벽한 관용과 아량의 본보기를 보였다. 이 같은 관대함이 바로 많 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한 이유이다. (Sunan Al-Bayhaqi, 9/118, 18342, 18343)
630 - 631년
아랍부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임:
평화로운 메카 정복 후, 아라비아 전 역에서 대표단이 찾아와 이슬람을 배우게 되었다. 대다수 아랍부족은 서둘러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와진(Hawazen) 부족은 자 신들의 세력을 믿고 저항하였으나 후나인(Hunayn) 전투에서 패배했 다.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교우들을 아라비아반도 여러 지역에 이슬람 선생으로 파견했다.
"예언자 무함마드SAW가 메카로 들어간 주요 목적은 카아바를 정화시 키는 것이었다. 즉, 그는 오랫동안 아랍인들이 머리 숙여 숭배해온 거짓 우상들을 모두 부수었다. 마침내 카아바는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숭배 하기 위한 순수한 장소가 되었다."
632 CE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고별연설: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임무는 완성 되어 그의 사명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 드는 성지순례를 수행하며 10만 명 이상의 무슬림 순례객 앞에서 생 애 마지막 설교를 했다. 설교를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하나님의 유 일함에 대한 믿음, 생명의 신성함, 사유 재산의 소중함, 인종 평등, 공정 의 원칙, 여성의 권리 및 도덕성 등의 가르침을 전달했다.
예언자 무함마드SAW의 사망: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SAW는 메디나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약간의 소지품만 남아 있었다. 세상을 전부 가졌음에도 재산은 1 디나 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영혼은 마치 처음 전해졌을 때 처럼 오늘날 아직도 또렷하게 살아 있으며, 세계 수십억 명이 그의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 임무가 이룬 기적과 아름답게 성취된 그의 목 표를 증언하고 있다.